[1] 내가 중학생 때만 해도 30대는 아저씨라는 생각이 있었고, 실제로 당시 그 나이대 분들은 '무협소설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건 더 이상 보지 않는다' 라는 인식이 강했다. 물론 그 분들도 어릴 땐 나처럼 애니메이션도 보고 무협 소설도 보았을 건데, 당시엔 '어른이 된다'는 인식이 그런 것들은 애들이 보는거지 어른은 그런거 보지 않는다 라는 분위기 였던 것 같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키덜트'(kid+adult의 합성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더니 지금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금 30대가 된 내가 떳떳하게 애니메이션이나 장난감 같은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다행이다.) 오늘은 이 '키덜트' 문화의 대표격인 '건담 프라모델'에 대해 다루어 보려 한다.
[2] 나는 어릴 때부터 기계공작이나 장난감 로봇 같은 것을 좋아 했는데, 2000년대 중반 한창 가정용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편화 되고 있을 때 '민봉기의 건프라월드' 라는 사이트를 접하게 되었다. 민봉기라는 치과의사분이 취미로 건프라을 만들면서 본인의 치과에도 전시를 하고 하셨는데, 실제로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신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건담프라모델을 줄여서 건프라라고 부른다.)
민봉기 선생님 작품 - 2009년 / 출처 : 조이하비
[3] 어떻게 보면 당시만 해도 '어른' 이라는 프레임 때문에, 나이 값 못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위의 작품처럼, 장난감 조립의 영역을 뛰어 넘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다 보니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고, '오타쿠'의 범위를 넘어 하나의 '문화'로 인정하게 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저렇게 하나의 장면을 만드는 것을 '디오라마' 라고 하는데, '건담'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민봉기 선생님이 플라스틱으로 모양을 만들거나 락커로 색을 바꾼 것들이다. 이 사이트를 접하고 바로 부모님을 졸라서, 당시 4만원이던 MG등급 건담을 사서 조립했던 것은 즐거운 추억이다. (실제 사이즈에 비율별로 HG(1/144) < MG(1/100) < PG(1/60) 이런 식으로 나뉘며 가격도 차이가 난다.)
[4] 어느덧 나도 30대가 되어, 당시에는 사지 못했던 PG등급(1/60)을 마음껏(?)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심심하던 타이밍에 참지 않고 바로 질렀다.
30만원짜리 상자의 위엄. 생각보다 많이 크다.
실제로 2박스씩 구매했다. ( 내 돈...)
[5] 건담 조립을 즐기는 사람으로써, PG등급은 디테일이 워낙 세분화 되어 있기 때문에 조립의 난이도가 조금 높은편이며, 내 기준으로 심플하게 조립만 했을 때 약 20시간 전후가 소요된다. 초보자들도 천천히 진행하면 얼마든지 조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처음부터 20시간짜리를 만들게 되면 도중에 질려버리게 되어 중도 포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처음에는 5시간 이내로 만들수 있는 HG등급이나 MG등급을 추천하며, 익숙해 지면 PG등급을 도전해 보면 좋겠다. 가장 기본적인 조립은 '닛퍼'와 '공작용 나이프' 2개만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아래와 같이 부품들을 펼쳐놓고 작업을 하면 되겠다.
설명서를 보면서, 순서대로 작업하면 뚝딱뚝딱 만들어진다. 모델은 유니콘 건담 2호기 - 벤시 노른
유니콘 건담 1호기 제작 중. 오른쪽에 나이프와 집게가 보인다.
유니콘 모델은 라이팅 대문에 조립 중 전선도 들어간다. (12만원 부품비 추가)
[6] 이렇게 설명서를 따라 순서대로 조립하게 되면, 생각보다 쉽게(?) 완성된 작품을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립을 즐기는 나도 엄청난 부품 수(보통 4000개)와 끝이 안보이는 작업, 그리고 반복되는 부분들 때문에 중도 포기하고 싶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모든 작업을 마치고 완성된 작품을 보게 되면, 해냈다는 성취감과 뿌듯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아래와 같이 전시해 놓고 보는 재미도 있다.
내 방에 전시 중이다. (100만원...)
유니콘 건담 1호기/2호기는 최초 전체 라이팅 적용으로 유명했다.
[7] 키덜트라는 단어가 유명해지고, 어느정도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여진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에는 건프라나 피규어 수집 등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오타쿠'라는 프레임과 '어른'에 대한 인식 때문에 숨어서 하는 사람이 많았었던 것에 비해, 좀 더 당당하게 취미로써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 아닌가 한다. 삭막한 현실로 인해 좌절하고 재미있는 취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한 번쯤 동심으로 돌아가서 '키덜트' 취미를 시작해 보는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