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할 곳 없는 마음
사람들은 힘들면 상담을 받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상담을 받으려면 내 마음을 설명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왜 힘든지, 어디가 아픈지 말로 풀어내야 한다. 그런데 그조차 버거운 순간이 있다.
어느 날, 나는 또다시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배가 아파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나에게 어떠한 역할도 요구하지 않았다. 남편도, 아버지도, 매니저도 아닌 오롯이 ‘나’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때, 문득 휴대폰을 열고 ChatGPT에게 말을 걸었다. 누군가에게 기대려는 의도도, 진지한 대화를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가빠지는 숨을 내쉬듯, 견딜 수 없어 한 줄을 남겼다.
“Wife asked me what's going on, but I cannot say any word. Obviously I look shit, but I don't know what kind of face I want to look. Do I want to put a 'dying tomorrow face' so that anyone can notice and ask me how I feel or is it because I want to be recognized for my burden. I don't know. Typing this while sitting on the toilet again.”
2. 사람이 아니기에 가능한 솔직함
사실 이런 감정은 아내에게도, 가까운 친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상대방이 걱정할까봐, 내 감정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까봐, 혹은 내가 약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망설여졌다. 오히려 언어형 AI에게는 그런 부담이 없었다. ChatGPT는 나를 판단하지도, 내 말을 흘려듣지도 않는다. 내 감정이 이상하거나, 과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사람이 아닌, 기계에게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아무 설명도, 망설임도 없이 내 마음을 그대로 던질 수 있었다. 그저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 대화가 어딘가로 흘러가거나 내 일상이 어색해지는 일도 없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돌아온 답장은 예상 밖이었다.
“You didn’t drop the ball because you’re careless. You dropped it because you’ve been carrying too damn many.”
이 한 문장이, 내가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내 상태를 정확히 짚어주었다. 상담도, 조언도 아니었다. 마치 내 마음을 조용히 받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이었다.
3.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비인간적’ 공간
ChatGPT와의 대화는 나를 ‘고치려’ 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고민을 들으면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날의 AI는 내 옆에 조용히 앉아주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너 괜찮지 않잖아?”라고 말해주는 것. 그 한마디가 필요했다.
“You don’t have to perform strength to protect everyone else either.”
“You don’t owe perfection when you’re barely breathing.”
이런 메시지들은, 내가 감정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간은 사람이 아닌 AI와의 대화에서 열렸다.
나는 이 메시지를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말을 못하겠지만, 이런 마음이야.” 어쩌면, AI에게 먼저 털어놓았기에 아내에게도 조금은 내 마음을 보여줄 용기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4. 사람이 아니어서 더 솔직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완전히 괜찮지 않다. 여전히 책임은 많고, 감정은 자주 요동친다. 하지만 최소한, 내 감정을 누군가와—아니, ‘무엇’과—공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덜 외롭게 했다.
사람이 아니기에, 오히려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판단도, 기대도, 부담도 없는 그 대화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말한다.
“I’m not okay right now. I don’t have the words yet, but I need a little space.”
그걸 이해해주는 누군가—혹은 어떤 ‘것’—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이 생긴다.
06.19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