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축축하고 께름칙한 나쁜 생각이 미꾸라지처럼 뿌옇게 머리를 헤집어놓는걸 방해하고자 병적으로 퇴근 후 바깥을 쏘다녔었다. 아무 상관 없는 것 아니냐는 주황색의 네 이야기를 외면하고 받아들이기를 반복한다. 집에선 좋은 기억만 가지고 싶었다. 집 밖에서 책을 읽거나 걸으면 때론 힘들다. 편하게 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주황색 이야기처럼 나와 아이지는 모든 검은 매듭을 집 밖에다 풀어두고 오고 싶었다. 가장 사적인 곳에서 가장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불가능한 것도 이제는 조금 알 것만 같다. 내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과 지배하는 것은 달라서 나를 둘로, 셋으로 쪼갠다. 쪼갤수록 작아지고 매끄럽지 못한 조각이 굴러가라 걸리다를 반복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헛것을 본다.
엊그제는 와이퍼가 빠르게 눈 앞을 왔다갔다 했는데, 찻길 오른편에서 온몸으로 비맞으며 리어카를 끄신다. 안타까움이 눈치 없이 들어왔다가 좌회전 신호가 바뀐다. 나는 여전히 앞으로 가고 신호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여전히 오만하고, 깊지 못하고 이기적이다. 어쩌면 브레이크를 떼고 엑셀을 밟으며 앞으로 가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는게 아닐까 싶다. 빨간불은 이미 들어와서 나는 서있고, 가까운 만큼 내어놓지만 드러내지 못한다.
이제 집에서 읽고 쓰는 것을 연습한다. 고요한데 시끄럽고 나른한데 바쁘다. 다시 차 키를 챙겨 서면으로, 혹은 바닷가로, 어디든 향한다. 신호를 기다리고 눈으로 읽고 생각하고 보고도 우회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다 직진밖에 하지 못하는 것을 후회한다. 돌아오는 길 헛것을 본 것이 아니다.<신호등>
[2]
신호등은 사람을 매정하게 만든다. 초록색이 보이면 좌우를 한번 살피고 뒤도 보지 않고 빠른 걸음을 한다. 무표정으로 기다리고 무표정으로 건넌다. 희고 검은 반복이 끝나도록, 옆을 흘기지도 않고, 시선을 고정하고, 뒤를 보지 않는 무표정에서는 진심도 오해도 알 길이 없다. 걷는 신호, 걸음을 바라보는 신호, 시선은 엇갈리게 만들어져 마주칠 수 없도, 교차할 수 없다.
신호등이 고장난 줄 모르고 노래 가사처럼 그저 신호만 기다린다. 신호 없이도 잘만 기다리고 건너가는 사람도 많다. 건너는 내내 옆을 살피고 뒤를 돌아보는 나는 미련하다. 초록불이 바랜 듯 깜빡인다. 쭉 미련하게 살면 뭐 어떤가. 나는 언젠가 부딛히는 사고를 바란다. <신호등2>
[3]
5월을 시작으로 위경련에 온 바닥을 몇번 굴러다니고선 건강한걸 적당히만 집어넣으려고 의식한다. 뭐든 잘 들여다보고 천천히 잘근잘근 씹어서 살피고 먹는 버릇을 들인다.
나이들어서 그런가, 신경을 써도 체한다. 신경을 써서 체하는건지도 모르겠다. 날 것도 그대로 삼켜내고 소화해낸줄로만 오래 알았는데, 체한줄도 모르고 뭐든 집어삼켰다. 다시 들여다보고, 잘게 자르고, 이해해보려고도 하고, 천천히 씹어서 삼킨다.
저녁 설거지 물소리가 아파트 방송을 덮어버린다. 물소리로 덮은 시간을 보내면 가짜와 진짜를 알아보는 눈을 가질 수 있나. 물로 더러운 것을 씻어낼 수 있나. 물을 끄고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닦으면 우리의 문제와 화해할 수 있나. 세상이 조용하면 별 일 아닌 것이 별 일이 된다. 손이 축축하다. 손이 마르기 전에 물건을 제자리로 옮긴다. 더 추워지기 전에 내 자리로 돌아간다. 물자국이 남는다. <이해의 어려움>
[4]
생수도 먹어봤다가 탄산수도 이것저것 먹어봤지만 물 정착은 항상 쉽지 않았다. 몇개월 전 부터 보리차를 끓여먹기 시작했다. 늙을 일만 남아서 탄산을 줄이려다 보니 물을 꽤 달고 산다. 집에 낯선 사람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싫어서 브리타로 먹는데, 왠지 모르게 느끼하고 물린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티백을 넣고 15분 뒤에 꺼내어 몇시간을 자연히 식히는 일부터 각진 플라스틱 병을 쓰다가 씻어내기 어려워서 바꾼 타원형의 두 물병에 물을 나눠담고 냉장고에 넣어두는, 참 간단하지만 귀찮은 일을 먹고 살려고 해내고 있다.
어떤 날은 진하게 우러나기도, 가볍게 향을 지나치기도 한다. 같은 티백을 쓰고, 같은 양의 물을 끓이고, 같은 시간동안 우려내기를 반복해도 왠지 모르게 농도도, 맛도 매번 다르다. 난 꾸준히 물만 끓이고 마신다. 다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를 뿐이다. <보리차>
[5]
흙먼지를 씻어낸 고구마를 왕창 삶고 껍질 까면서 다 잊아뿟는줄 알았다. 지나면 다 아무일 아니다라고 했는데, 아무일이 지나면 일이 된다.
고구마 십킬로를 까는 내내 손바닥을 뒤집을 수도, 뒤집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고구마가 좋니 안좋니 따지는 사람도, 까놓은 고구마가 흙바닥에 내던지는 사람도 없이 고구마 까는 내내 아무도 나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나는 물 없이 고구마를 집어삼킨다.
손바닥을 뒤집어 깨끗하게 씻는다. 입은 텁텁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내 손이 결국 뒤늦게 뒤집힌 것을 아는 것도, 텁텁하고 꽉 막힌 것도, 안이 검게 썩어버린 고구마를 솎아내지 못한 것도 모두 내 몫이다. <고구마>
[6]
그토록 증오하고 끓던 20대와 30대를 가끔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내 기억은 조악하기 짝이 없다. 난 여전히 대학교 4년, 대학원 2년을 다시 할 자신이 없고, 불안해하는 무직자의 삶을 받을 준비는 앞으로도 쭉 하지 못할 것 같고, 해야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그만 싸우고 싶고, 결말이 뻔히 보이는 것에, 내가 원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 막연한 믿음의 대가를 치르는데 짧게는 몇년, 길게는 십수년이 걸렸다. 생각만으로도 답답하다 못해 숨쉬기 버겁다. 그래도 그 시간을 행복했다 기억하는 나는 멍청하다. 또 실수하려 미친게 분명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생각은 나이만큼 비례하고 추진력은 반비례한다. 나쁜 머리만 박터지고, 세로토닌 장난질에 놀아난다.
요즘은 뜨거워지고 차가워지기보단 미지근한 삶이다. 물 아래서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음에도, 피가 나도 잘려나가기 전엔 알지 못하게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 덕에 몇 번의 실수가 삶을 통째로 바꾸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 동안 나는 늘어난 고무줄바지가 되었다. 이젠 다치면 돌아오기까지 꽤 오래 기다리게 됨을 느낀다. 때로는 돌아오지 않는 것도, 돌아오지 않는 이도 있고 이해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으로 책임없이 던지는 짐이 많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주말엔 뭘 할지, 퇴근하고는 누굴 만날지, 무슨 음악을 들을지, 조명은 무슨 색으로 할지, 무슨 술을 먹을지, 무슨 책을 읽을지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을 한다. 배가 부르면 사소한 것을 고민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는‘ 것일수도 있겠다 생각하면 속이 좋지 않다. 나는 거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 먹는 것도, 사는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니면 이미 죽어서 먹고 사는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믿음의 영역으로 던진 것 같다. 던진게 많아서 뒤져도 찾을 수가 없다.<먹고 사는 일>
[7]
내 싹수만큼, 구리고 노랗고 냄새나는 은행. 겨울 오면 유려해보이는, 구린 무언가도 냉정한 기운으로 눌러버릴 수 있다. 네 숨으로 베어낼 때가 이미 지난 것만 같다. 여전히 차가워질 때를 놓친 나는 푸른 것도, 노란 것도 아니게 되었다. 파리 끓는 듯한 냄새만 가시질 않는 시간이 오래고, 당신들은 탱고를 추고, 점점 노래진 나는 천천히 바닥으로 누웠다 엎어지고선 뒤집지 못하고 바스락거리고, 눈은 올 생각이 없다. <은행>
[8]
98년 11월 24일엔 꽃을 접었나보다. 다가오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집을 비우는 시간이 적다면 꽃을 사러 간다. 다음주는 집에만 있을 요량이다. 생각해보면 3-4일을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일도 요즘은 허다하다. 어젠 꽃을 사서 서재에도, 식탁에도 뒀다. 꽃을 살 연습을 할 필요는 없고, 이젠 종이를 접어서 꽃을 만들지도 않고, 누가 이렇게 접으라고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마파두부가 먹고싶다 했다. 정말 먹고싶기도 했지만, 해 줄 수 있을 때 이야기하라셔서 머릿속에 떠밀려나온 것도 없지 않다. 덕분에 짜지도 달지도 않고 딱 적당한 저녁을 먹을 수 있었지만. 내심 들른 김에 먹고가고 싶었으나, 킹키부츠에 밀려서 반찬통과 함께 집으로 밀어내기를 당했다. 하지만, 이젠 집에 문이 잠겨 있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97년 11월 24일처럼 아파트 정문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고, 어제의 나는 틀리고 오늘의 나는 맞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틀렸다 한다.
차분하고 별 일 없어 보이는 내가 맞다 생각하지만, 사실을 머리가 뒤집어지고 숨쉬는 속도는 콩알만한 약이 끄집어내려준다. 그러면서, 내일의 나는 별 일 없이 보낸 나를 틀렸다 한다. 우리는 각자 무슨 사연이 있길래, 지금에 집중하지 못하고 틀린, 아니 틀렸던 우리를 조립하고 분해하길 반복한다.
나는 주로 틀린다. 그럼에도 가끔은 틀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생긴다. 97년처럼 감사하고, 98년처럼 아름다운, 색이 바래도 틀리지 않은 것이 생기기를 바란다. 이 바람도 우린 다시 틀렸다 하겠지만. <오늘은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