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월 1주차 <남들>
남들처럼, 남들만큼 한다는게 어려운 이유는 딱 짚어 말할 수 있는 기준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남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말할 수 없었고, 그걸 안다고 한들 ’남들‘의 사정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그들만큼, 그들처럼 한다는 것도 넘겨짚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모호하고 무책임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기준을 나에게 둔다면 앞서 말한 두가지의 모호함들을 피해갈 수 있고, 거리두며 닫고 사는 것고 하나의 방향이라 생각하니 받아줄 수 있는 마음 한 칸을 빌릴 수 있었다. 매주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주중의 대부분을 쫓기면서 일하다 지치고, 하고 싶은 운동도, 적당히 가까운 사람들과 주제도 남는것도 없는 잡담을 하는 시간이 나쁘지 않다. 이 나쁘지 않음이 이대로도 괜찮은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뭣이 중한지도 모르고 자꾸 거위의 배를 기여코 가르고 후회한다. 나는 안주하지 않으려, 나와 주변에 흙탕물 튀기지 않으려 뛰고 구르는데..남들은 잘만 하던데..
[2] 1월 2주차 <냄새>
숨김 없이 생각한 것들을 말과 글로 꺼내버린 후에 솔직하다는 이름표만 붙인다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하는건 참 아슬아슬해보인다. 이만큼 무책임한 행동이 있을까? ‘아님 말고’ 식의 태도는 곤란하다. 솔직하다는 탈을 쓴 무례함으로 누구든 조준하고 집단 린치 수준의 팬픽을 여기저기 읊어대고 옮겨대는건 쉽다. 왜 그렇게 사는지 묻고 싶지만 이마저 묻어뒀다. 가능하면 가까워진 거리보다 더 멀어지고 싶다. 종잇장처럼 얇은 우정으로 남 험담이나 하며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그들의 부족한 나이값이 풍기는 냄새가 나에게 닿기 전에.
[3] 1월 16일 <늦은 인간>
이랬다 저랬다 하는 나를 나라도 받아들여야지 누가 받아들일까. 그래도 남들과 약속한 일은 하고, 책임질 일은 끝낸다. 내가 돈 값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그 가까이는 가려고 한다. 배포가 크지 못해서 못한다고 이름 오르내리는건 너무 싫다. 할 도리만 하면 되는 사회관계는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 다만 혼자 속시끄럽게 살 뿐이지. 난 속시끄러운 사람이고 그런 나를 받아들이는 연습중이다. 스스로 심플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것도, 어쩔 방법이 없어 미안하다.
넌 직선으로 곧게 걷지만 나는 나선으로 걷는 사람이다. 길을 가로질러 가다 중간에 멈춰버리는 것 보단 빙빙 돌아도 가려했던 곳으로 언젠간 갈 것이다. 너는 언제나 시간 이야기를 한다. 늦지 않았나 나도 생각할 때가 더러 있지만 이내 누워버린다. 난 항상 여러모로 늦었고 때를 놓쳤다. 그런 내가 아쉽고 남들이 부러울 때도 더러 있다. 언제 한번이라도 시간도, 상황도 내 편인 적이 있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돌고 돌아가는 이 늦은 시간이 계속 이어졌음 좋겠다. 빠른 결말을 바라는 너의 행복보단 느린 지금을 조금 더 길게 주시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다. 원하는 곳에 빨리 가서 행복한가? 어짜피 난 늦었다. 늦은 김에 돌아간다는 변명이라도 있어야 죄를 더는 기분이다.
[4] 1월 3주차 <질서>
일이나 상황이 생각한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나는 보통 행운을 바라지만 주로 후자에 가까운 일이 생긴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기본값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막상 마주치게 될 때마다 그리 달갑진 않다. 나이를 먹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서른 중반 아저씨가 되어서야 내가 사는 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뭐 어쩌라고” 할 수 있는 여유는 조금 생겼다만, 중요한 일들에 달갑지 않은 상황을 맞을 때엔 아직도 요령이 없다. 손가락이 20개였다면 손톱을 모조리 물어뜯고 싶은 심정일 때가 더러 있다. 정면으로 부딛혀 나름의 방식으로 수습하고선 마음 내킬 때 까지 도망가던걸 계속 했다간 단명할 것 같았다. 요즘은 마음의 거리를 둬버리고 싶어 평소의 나대로 살아보려, 매일 가던 곳을 가고 먹던 것, 걷는 곳, 하는 일을 반복해서 나만의 질서를 지키고, 흔들리지 않게 나를 다잡으려한다. 그러다 서서히 기억에서 녹아 사라지게 두어(사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 나의 어찌 할 줄 몰랐던 불안함을 속인다. 사소한 일 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일까지 삶의 질서가 흔들리는 경험이 몇차례 있었지만, 여태 나는 살아있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마음쓰기를 멀리하는 것을 10대, 그리고 20대의 흔들린 내 질서로부터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나는 내 질서를 깨고, 시간을 깨고, 어긋남을 깨고 흘러가버린 것들을 마음에 가까이 한다. 나는 행운을 바라는 걸까 아님 돌이킬 수 없는 이들의 무운을 바라는 걸까. 그들을, 그리고 그 시간에게 행운과 무운을 동시에 바라는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고 부정하고 싶어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운 마음은 쉽고, 후회는 늦다.
[5] 1월 4주차 <달달한 불안>
세상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남들의 머릿속에 들어가본 적이 없어 단정짓긴 어렵지만, 나의 경우는 어느 종류가 되었든 간에 불안함을 안고 산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 2000년대 초반 출간 이후로 꾸준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요즘 스마트폰 마냥 다들 가슴속에 하나쯤은 달고 사는 듯 싶다. 나의 불안함은 때론 오히려 원동력이 되어 좋은 방향으로 나를 이끌기도 하지만(오히려 좋아?), 주로 망설이는 나를 더 망설이게 만들고, 오르막길을 가는 나를 반대방향으로 서서히 밀어내고 가속하는, 달갑지 않고 구질구질한 역할을 담당한다. 불안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지만, 오히려 꽤 친한 사이라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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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시절의 나는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비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주어진 일들을 잘 쳐내는 것을 넘어,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돌아보면 컴플렉스로 만들어진 인간같았다.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나의 불안과 시간과 고민, 청춘(?)을 끓는 용광로 투척하여 만들어낸 철의 디딤돌에 스스로 꽤 만족스러웠고, 크고 작은 병, 그리고 주변을 챙기지 못해 생겨버린 폐기물들을 함께 남겼다. 잘 딛고 오른 이후엔 필요없는 것들은 치워보려고 노력중이긴 한데, 얘네도 고철덩어리라 쉽지가 않다. 돌아보면 왜 그리 불안하고 예민하게 굴었나 싶다. 방구석 래퍼들이 없는 헤이터 만들어서 쓰는 팬픽처럼, 아무도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고용불안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증명을 빌미로 나를 때린 것도 나, 맞은 것도 나였다. 5년 전의 불안의 힘은 줄어들었지만, 그 자리엔 다른 불안함이 세들어 살고있다. 지랄같은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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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달달하다. 사탕처럼 언제나 손 닿는 거리에 있어 찾기도 쉽고, 내 이불처럼 나를 숨길 만한 좋은 수단같은 변명이 되기도 하고, 때로 운이 좋다면 주변인들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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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랄맞은 단맛이 작년에도, 지난주에도, 어제도 잊혀지지 않아 괜히 씁다.
2024년 2월 21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