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4월 에세이(내열유리, 아저씨, 짐, 밑 빠진 독, 숙제)

[1]
<내열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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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으로 후회 없이 살기 위해 지키고픈 것 중 하나는 ”하루의 절반은 이기는 DNA로, 나머지 절반은 승패는 신경도 안쓰고 그저 진폭을 줄일 만한 변수를 찾고 찾아 열과 성을 다해 제어하곤 파도 없는 잔잔한 저수지같은 마음으로 사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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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동안 이런 식의 냉탕 온탕을 오가며 느끼던 자기혐오가 담금질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쇠가 아니라, 내열 유리 정도이지 않을까? 이 담금질을 멈출 용기도 명분도 없어서, 자칫 깨지면 누군가 밟아 다칠 것 같아서, 생각하는 것도 결국 담금질이라서,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2]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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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 몰라도 꼬박꼬박 겨울엔 봄 준비하고, 여름엔 가을 준비하던 내가 민망할 정도로 아무 준비 없이 살고있다. 재택근무라는 이유도, 체육관, 집(이라 쓰고 사무실이라 읽는다) 으로 이어지는 생활 반경의 탓도 있겠지만, 외출용 옷을 사는 빈도가 현저히 줄었다. 사시사철 편한 옷이면 그만이라는 생각만 들면서, 컴퓨터 앞에서 쇼핑할때나 백화점엘 가도 남성복은 지나쳐도 운동복, 등산복 못지나치는 것을 보니, 이제는 내가 아저씨라는 것이 운명 뭐 이런게 아니라 눈 앞의 현실이라고 누군가가 일부러 보여주는 것만 같다. 운동복과 운동화 밖에 없는 삶 덕분에 몸이 편해졌지만, 몸매도 어릴 때 보다 편해져버렸다. 분명 아침마다 거르지 않고 운동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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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에 별 신경쓰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아저씨가 되었나, 아니 어른이 되어서 외적인 것 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좇고 있는 거라고 생각이 들면서 살짝 뿌듯한 마음이 스친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력을 키우고 싶다고 매번 바라고 고민했는데, 이젠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생긴건 아닐까 내심 좋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침부터 이른 더위에 냅다 10킬로를 달리고 후달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꾸역꾸역 백화점 조명 섹션에서 이건 언제 들어오냐 저건 뭐냐 이것저것 재고 있는 한심한 인간이 아직 여기 살아있음을 확인하곤, 아직 멀었다고 생각해버렸다.
[3]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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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이라도 부탁하거나 거절하는 일은 어려서부터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 중 하나다. 손이 빠르지 않고, 자주 무언가를 놓치기 일쑤라 업무 캘린더며 개인 캘린더는 해야할 것들, 부탁한 또는 부탁 받은 것들이 착실하지 못한 내 속도 모르고 미룬 설거지마냥 정리되지 않은채로 나를 덮고 있다. 하나씩 차근히 해결해보려 해도 마음의 속도만 나를 가로질러 가고 있는건지 생각만으로도 복잡해져서 이내 생각하기를 관두고 다시 쌓기를 반복한다. 마음을 먹고 미룬 일을 정리하자니, 하나를 치우면 잊었던 새로운 일거리가 잠시나마 빈 자리를 빠르게 채운다. 눈에 보여야 잊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자주 보려고 노력하지만, 볼 수록 마음이 무거워지고. 손과 머리는 그 무게 때문인지 되려 더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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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쌓은 짐, 누군가를 향에 쌓은 짐, 그리고 남이 나에게 쌓은 짐으로 온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처음과 두번째는 스스로 포기하고 인정하길 반복한다지만, 마지막 것은 정리가 어렵다. 매번 사소한 것들이 쌓여 무겁게 누르고, 깔리길 반복한다. 하지 못한 일, 가지 못한 곳, 만나지 못한 이, 말하지 못한 것들로 가끔은 자다가 빠르게 뛰는 불편한 가슴으로 눈 뜨고선 뜬 눈으로 몇시간을 생각하다 말다를 반복한다. 남의 팔이 잘려도 내 손끝 베인 게 제일 아프다던 그 가사가 나를 몇년간 누르고 있었는데, 반대로 당신의 짐이 얼마나 무거울지 알 수가 없어 함부로 재단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쉽게 아니라고 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는 척 손을 뻗고선 스스로를 절벽으로 던지고 불시착한 나를 일으켜 세우지도 않고 지켜보기만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나는 내가 어떻게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버리고, 나를 어렵게 만든, 마치 사고와 같은 일들은 내 탓이고 오해였다고 생각하는 나에게서 재차 모순을, 그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업보처럼 여태 쌓아둔 사소한, 어쩌면 사소하지 않을 수도 있는 짐들이 발에 채여 요즘은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다.
[4]
<밑 빠진 독, 그리고 물 붓기>
1. 밑 빠진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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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배가 고프지 않았다. 이 시간에 뭔가를 먹으면 안되는걸 모르는게 아니다. 내 체중 조절은 누구보다 내가 더 간절히 바란다. 음식이 먹고싶은 것도 아니었다. 집에는 요기한 만한 음식이 있었다. 시킬 생각으로 배달 어플을 켠 것도 아니다. 그냥 구경할 요량도 아니었는데, 배민을 돌아보다가 먹지도 않을 음식을 고민해서 시키곤 배달이 오기까지 기다리다 잠들어버린다. 현관벨 소리에 깬다.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배달 기사님이 12층까지 올라오길 기다린다. 음식을 받았는데 배가 고프지 않다. 좋은 음식 냄새가 나지만 딱히 먹고싶지 않다. 음식을 그대로 두고 싶지만, 반사적으로 포장을 해체한다. 이내 부엌에 음식을 치워두곤 침대를 그대로 두고 소파에 누워버린다. 불을 켜놓고 잔 턱에 잠든 내내 불편하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침실에서 자면 될 것을, 불편함을 몇시간째 감수하고 그냥 참는다. 씻는데 몇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면서. 새벽내내 잠을 설치다가 심장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은 불쾌한 두근거림과 함께 매일 깬다. 겨울이 가버린 탓에 해가 길어져서 이른 새벽빛은 주말도 없이 눈을 때린다. 토요일엔 잦아들 줄 알았는데 불쾌하고 두려운 호흡이 나이질 틈이 보이지 않은 것에 괜히 짜증이 섞이고, 받아줄 사람 없이 고스란히 내가 받는다. 그제서야 씻고 집을 치우곤 이른 아침이지만 주말은 쉬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불안감에 이틀을 괴로워한다. 해야할 일에 쉬는것도 집어넣다보니 쉬는건지 일인지 어렵다. 돈 버는 날도, 돈 쓰는 날도 방법을 모르겠다.
2. 물 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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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곳곳에 의자를 들이기 시작했다. 초년생 시절 이쁜 의자를 보면 침만 질질 흘리고 사지 못했던 보상 심리가 분명하다. 의자 두세개만 있으면 사는데 아무 지장 없지만 또 찾고 또 살까 말까 고민한다. 매일 앉아있을 것도 아니면서, 어제처럼 다 먹지도 못할 배달음식을 시키는 것 같은 설명하기 힘든 욕심인가 싶은 생각을 하면서 이미 매장으로 달려가거나 홈페이지로 들어가 결제하고 있는 내 모습이 선하다. 어짜피 살거면 지금이 제일 싸다는, 설득하기 쉬운 스스로를 위한 이유는 이미 차고 넘친다. 마음에 둔 물건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운이 좋다는 이유를 추가할 수 있다. 집으로 데려와선 거실에도 놔보고 서재에도 놔본다. 내가 여태 보지 못했던 내 공간의 모습이 보인다. 이 자리에 의자가 없었다면 공간의 이런 모습은 아마 오래도록, 혹은 단 한번도 보지 못했으리라. 의자 살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기능이다. 어디에 놔야지 만 생각했지, 거기에서 어떤 뷰가 보일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공간을 제한해서 보기도 하고, 전체가 보이는 코너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바라도 본다. 의자를 마주하고도 앉아본다. 앉는 것의 가치, 매일 있는 곳를 달리 볼 수 있음을 돈으로 샀다는 생각도 해본다. 의자를 사지 않고도, 내 의자도 옮겨서도 볼 수 있었을텐데, 의자를 괜히 사지 않았음을 설득하는 내가 우습다.
[5]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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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엔 숙제하기도 싫고, 누가 뭘 시킬 때 드는 묘한 기분나쁨이 싫어서, ’빨리 어른됐으면 좋겠다‘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나이가 차면 자연스레 이런 불편한 마음이 나아져서, 응당 어른이라면 갖추어야 할 의젓한 마음가짐으로 뭐든 척척 해낼줄만 알았지. 어른들은 그래보였다. 최근에 수년간 이어왔던 영어수업에 기약 없는 장기 휴식을 선언하고 2주 정도를 흘려보냈다. 이유를 들자면 몇가지를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나열할 수 있을 정도로 꽤 고민해왔던 일이지만 해명 아닌 변명일 것이라 접어두겠다. 그 중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한 시간 남짓이면 해낼 수 있는 간단한 숙제를 곧잘해오다가도 요즘엔 한시간도 못 쓰는 사람이 되어버려서, 수업이 있는 날 아침에 정신없이 숙제하는 모습을 인지하고선,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업은 좋을 뿐인데, 숙제가 마냥 싫어졌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 고민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싫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고 싶었던 것이 점점 해야 하는 일에 물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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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요즘 가장 많이 입에 다는 문장이라, 나의 불완전함을 자주 맞닥뜨린다. 시간이 없다고 하지 말고, 하기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나도 속이고 남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내 손발이 불타고 있는데 시간이 없다고 다 타버리게 두진 않을거면서. 뭐, 숙제를 손발이 탈 정도의 중한 일은 아니니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와의, 그리고 남들과의 약속이라 그렇게 가벼운 것도 아니다. 약속한 건 지켜야 하는데 자꾸 지키기가 싫어진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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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숙제는 그런 면에선 오히려 쉬운 편이다. 내가 영어를 잘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 1시간 정도만 집중해서 끝낼 수 있고, 명확한 범위와 수준이 있으며, 그저 시키는 대로, 가이드 대로 하면 끝내버릴 수 있는 일이다. 끝날 일이 아니라 끝내버린다고 쓰고 있는 것 부터 하기 싫음이 또 묻어나버렸다. 여튼, 이 쉬운걸 미루고 미루는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을 더는 느끼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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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숙제 말고도 다른 숙제가 많이 떨어진다. 돈 벌이 하면서 떨어지는 숙제는 미국산메뚜기떼마냥 우리를 쓸어넘겨버리고 있음에도, 나와 우리는 쳐내고 끝내고 쉴 틈 없이 Okay next 를 생각한다. 심지어 이런 숙제는 가이드도 빈약하기 짝이 없고, 범위도 없어서 엿장수 마음대로 결론내야하는 것들이 다반사다. 쉬운 영어 숙제 놔두고 어려운 숙제만 골라서 하면서, 숙제 밀린다고 스트레스 받는 내 모습은 우습다가도 한심하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실 내 숙제가 아닐수도 있는데, 내가 혹은 우리가 꼭 해야 할 것 마냥 행동하면서, 진짜 해야 할 숙제는 골라서 미루거나 없는 척 하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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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난 밀린 숙제를 하러 10일 넘게 숙제 시간을 대책없이 선언해버리곤 불안해 하고 있다. 아무 계획도, 가이드도, 범위도 없이.
2024.05.01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