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떫은 맛>
친구들은 하나둘 정도가 아니라 모조리 부산을 떠났고, 한국을 떠났다. 가끔은 믿었던 관계도 있었던 것 같은데, 기대하지 않으니 힘들 일도 없다. 내 의지만이 아닌 운도 따라 돌아온 남쪽이지만, 가끔은 대상도 없는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뭐하러 내려온걸까. 왜 내려온걸까. 내려오고선 좋은 일도, 힘든 일도 참 많았는데, 그곳을 등지도 돌아올 때의 마음과 같은 마음인걸 보면, 나는 적응의 인간이라기 보단 불편한 동물에 가까워보인다.
내가 선택한 실내 생활과 삶이지만, 확신보단 고민의 시간이 잦다. 나이탓인가 싶다가도, 사람답지 못한 행동도 여전하고, 별일 아닌 것에 속이 끓기도 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내 시간은 설익다 못해 떫고, 뱉고 싶은 맛이다. 하루 중 운동하느라, 커피 마시느라 바깥에 있는 시간은 길어야 세시간이고, 하루와 일주일, 한달을 모조리 가계부쓰듯 정리해봐도 나는 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좁은 눈으로 살고 생각한다.
집으로 출근하고, 집에서 퇴근하고선 집에 돌아와 눈에 보이는 집안일을 대충 정리한다. 소파에 멍하게 앉아있다 잠드는 날이 많다. 집 안에 있지만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나는 모를 일 처럼 산다. 아무 상관 없는 누군가를 보듯 나를, 주변을 돌아본다. 좁고, 짧고, 끊어질 대로 희미해진 관계를 흐린 눈을 하고선 못본 척 하고, 나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대하듯 한다.
이것이 내가 괴로움 속에서 살아남은 방식이다. 여전히 떫고, 뱉고 싶은 맛이지만 참고 머금었다가 삼킨다. 단맛은 언제였더라.
[2]
<알고도 하지 못하는 것들>
삽십년을 넘게 살고 벌써 마흔을 바라보게 될 시간에도 나는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스파게티 마냥 더 얽히고, 해체하고 싶지 않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뇌가 얽히고 쭈글한 이유는 이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이해하려 드는 것은 지치고, 당신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괴롭다. 나만의 거리감이 나의 죄책감을 덜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라는 신념이 틀리지 않았길 바라지만, 잃기만 하는 나를 향한 한심함은 나 스스로도 거두기 어렵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젠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살 수 있어 좋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누구에게나 십수년은 부던히도 길지만, 유독 나에겐 그랬던 것만 같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고 간절하면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하등 시선 밖 남의 일이 되는데, 요즘의 나는 아쉬운 소리로 돈을 벌고, 쓸모없어진 나의 거리감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잃는다. 뭐가 아쉬운걸까.
이해보단 결과론적 해석이 손쉬운 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저질러버린 일, 주변이 나에게 저질러버린 일들에 대해 “왜” 라기 보단, “그래서 앞으론 어떡할까”에 남은 생을 태운다. 뭐라도 하고나선 다음 단계에 다다르면, 그제서야 묻어뒀던 “왜” 가 제방을 손쉽게 밀어내고선 흐르다못해 소용돌이치고, 숨을 깊게, 그리고 빠르게 한다. 잠과 약으로, ”그래서 앞으로 어떡할까“의 마음으로 높고, 단단하고, 쉽게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제방을 다시 쌓아올린다. 그렇게 당하고도 ”왜“는 여전히 빠져있어, 언젠간 다시 무너질것을 나는 잘 알 것만 같다.
[3]
<삼원색>
어릴적엔 나도 마음이 하얀 인간이었을 것이다. 살다보니 빨간일, 파란일, 노란일들을 겪고 마음에 묻어두다가 겉에 색이 묻고 마르길 반복했다. 하얀 채로 무뎌진줄 알았는데, 검게 변해서 나도 무슨 마음인지 알 길이 없어졌다는건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나도 나를 모르겠으면서 감놔라 배놔라 하고 싶지 않은 탓인지, 평론도 싫고 논리로 무장했다는 사람을 보면 가능한 멀리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때로 평가를 하기도, 당하기도 하고 논리적인 자기방어기제를 펼쳐보이는 모순으로 산다.
속이 긁힐 때 마다 빨갛고 파란 내가 드러나고, 이내 후회하고선 덧칠했다.
여태 묻어두고 덧칠해서 뭐가 남았나. 내가 빨간 떡볶이와 자몽을 좋아하고 파란 수건을 좋아하고, 노란 호떡을 좋아하는줄 알게되었는데, 또 검은 덧칠을 갈겨버렸다. 난 얼마나 더 긁혀야 알까.
[4]
<그럴 수도 있지>
한참을 걸려야 갈 수 있는 곳엘 가보고 싶다. 멀고 긴 여행이 언제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데, 가능하면 가기 어려운 곳이면 좋겠다. 가면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여행을 돌아오는 길에 무엇을 손에 담아갈 수 있을지 설레는 마음은 없고, 어쩌면 돌아올 수 없는 여행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든다. 눈 앞으로 걷고는 있는데, 이게 참 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가득하니 뇌도 막히고 숨만 찬다. 막다른 길 끝에서는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고, 언제가, 뭐가 끝인지도 모르겠으니, 나는 무엇이 되었든 끝에 다다르고, 그 마지막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끝맺음도, 시작도 못하는 내 문제는 어떻게 되겠지 식으로 남일 보듯 사는 내 탓인 것 같다. 그놈의 그럴수도 있겠다는 입에서 뜯어내도, 이마에서 저릿하게 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이해한 척을 한다. 그럴 수가 없는 것도 그럴 수도 있겠다 넘겨버리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서 해석하지 못한다. 이해도, 관계도 쌓이지 못하고 이내 무너지고 사라진다.
대충 넘어간 것들이 대차게 얽힌 실타래마냥 꼬이고 뭉쳐있다. 어디부터 다시 매듭을 풀고, 묶어나가야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엉킨 부분을 잘라버리고선, 새로 매듭을 시작해도, 다시 꼬이고 엉킬 것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럴 수도 있지.
[5]
<기억 삽니다>
해 떠있는 시간엔 숨차고, 나머지 시간은 숨이 차는 것을 경계하며, 차는 듯 아닌 듯 산다. 생각과 말이 돈과 아무 관계가 없어지는 시간부터는 회복에 호흡하고 의식한다. 숨 찬 만큼 버는지는 모르겠으나, 쓰는 것 과는 상관관계가 꽤 있어보인다. 뭘 해냈나, 뭘 해야하나 기억하려 하지만, 짧기도, 길기도 한 시간을 기억해내는 것이 요즘은 어렵다. 기억해내고 논리정연하게 정리하고, 높은 확률의 정답을 자판기처럼 뱉어내는 것이 돈이 되는 것은 나도 알고 있고, 기억해낸 숫자로 벌어낸다. 기억해내야 할 것은 많다. 그런데 나는 어땠는지, 뭐가 남았는지, 내 의식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내는 것이 점점 어렵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게 번 돈으로 기억을 사는 것을 수없이 반복한다. 전화기로, 때로는 태블릿으로 읽고 듣고선 다시 손에 쥘 수 있는 CD와 책을 기어코 사낸다. 이젠 기억을 사서 전시하지 않으면 빠르게 흐려지고 이내 지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기억하고, 믿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시간과 기억을 태워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기억과 시간을 산다. 그러니 나는 시간과 기억을 탕진하고 싶다. 아까워서 두번 세번 고민하는 것에 질리면서도, 싫은 소리를 못하는 내 꼬라지를 보고있자니, 가랑비에 옷이 이미 젖어 무겁다. 아까운 시간과 기억이 무겁고 축축하다.
[6]
<공회전>
바뀌지 않는 주변을 중심으로 나를 바꾸고 재정비하는 것을 반복한다. 어쩌면 죽기 전까지 다들 반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숨만 쉬어도 우리는 늙어가고 다 지난 일이 되면서 생각은 시간만큼 길어지고 꼬인다. 어제까진 싫었다가 오늘은 아무렇지 않았고 내일은 역겨운 뜻을 스스로 뒤집어쓸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주변은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공전한다. 우리가 같은 방향으로,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특별하다.
2024.09.03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