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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5월 에세이(유통기한,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 여름, 앨범, 실패, 후회의 끝자락, 페인트 모션, 10년 1년 일주일 하루)

[1] <유통기한>
기약도, 해결책도 없는 시간보내기가 실패했다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음을 과학 앞에서 입증당했다. 몇 번의 검사만으로 긴 시간 방치했던 문제들을 점집마냥 풀어내서 설명하는 의사의 모습을 보곤 놀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입증 마저 부정하고 싶었지만, 받아들였다. 별 일 없는 삶을 바라면서, 아무것도 해결하려 들지 않고, 그저 시간을 부어가며 별 일을 덮으려는 요행을 바라는 것 만큼 무책임한 인간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그 모습을 하고 있다. 자기 모순을 이해해보려고 겁없이 맞선 나의 어리석음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고, 방법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는 약은 모습이 두번째 문제였을 것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줄도 모르고 시간에 기댄 것들이 못내 아쉽다. 또 시간이 지나면 다 제자리를 찾겠지.
[2]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
이야기 하지 않아도 편한 자리가 있고, 이야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자리가 있다. 나는 주로 전자에 가까운 자리에 익숙한 사람인데, 가족이나 정말 친한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 딱히 입을 열지 않아도 되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편이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관계 유지를 위해 시덥잖은 농담을 하지 않아도 되고, 억지 웃음 짓기 위해서 굳이 취향이나 날씨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영혼 없는 공감이나 눈맞춤을 하지 않아도 괜찮음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서로의 편안함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를 항상 추구하지만, 고약하고 예민한 성미 때문인지 쉬이 그러지 못한다. . 사람을 많이 만나진 않다 보니 깊은 이야기를 할 일도 없고, 특히나 취향이 맞는 사람들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음식 취향, 음악 취향, 소비 취향, 가구 취향, 커피 취향, 책 취향.. 흔하디 흔한 취향의 인간이지만,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를 찾는다는건 대화 만큼 항상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일생일대의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혼자 여기저길 쏘다니는 것을 선택한지 꽤 되었지만, 가족들과 시간이 맞으면 쏘다니거나 친한 친구들이 모일 일이 있으면 시간과 체력을 끌어모아서 답답함을 해소한다. 그것만으로도 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 커피 마시다 우연찮게 부모님 연배의 부부와 커피 이야기부터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시간을 훌쩍 넘겼다. 지난주부터는 약의 힘을 빌어 자고 일어난다. 그토록 부정했던 것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가끔은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즐거움을 마주하고선, 지금까지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하게 만든다. 난 왜 여태 대화하려하지 않았을까.뭐가 겁났던걸까.
[3] <여름, 앨범, 실패>
[3-1] <여름>
5월 말을 향해간다. 주중엔 내내 아침에 잠깐, 그리고 퇴근 후 외출이라 해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느끼기 어려웠는데, 주말에서야 비로소 초여름임을 직감했다. 원체 땀이 많은 나는 여름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이따금씩 여름이 좋냐 겨울이 좋냐라는 물음엔 망설임 없이 겨울이라고 하곤 했다. 손수건은 무조건 들고다녀야 하는 것도 귀찮고, 습기를 한껏 머금은 공기가 한증막에 있는 듯한 답답함을 주는 것이 싫다. 코로 숨쉬는 것이 원래도 힘든데, 여간 나를 더 힘들에 하는 것이 싫다. 요즘은 주말 이른 아침에 여름만큼이나 더울 정도로 런닝을 하곤, 맨발로 바다를 한참 거닐다 오는 것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아직 다 오지도 않은 여름이 괜히 아쉬워진다. 싫은데 좋고 두려우면서 기대하고 있다. 요즘은 나의 모순이 웃기다.
[3-2] <앨범>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는지 주변에 물어보고 싶다. 맞다 틀리다를 따지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릴적에는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지 않는 것은 맥락 없이 뭔가를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판단하는 기만행위라고 생각하는 별 꼰대같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런 마음에서 이미 훠이 벗어난지 오래다. 소위 ’좋아한다‘는 가수들의 작품들도 앨범 단위로 들어보지 않은 것들이 꽤 많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 몇곡 들어보곤 괜찮다 싶으면 한 두곡 더 찾아보고, 앨범을 담아둔다거나, 더 마음에 들면 사기도 한다. 라디오나 CD점의 플레이어로 한곡 듣는 것을 시작으로 더 찾아보게 되는 흐름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다. 다만 그 한곡의 가치가 엄지 손가락 움직임 한방의 무게로 바뀌었을 뿐.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약점이 되진 않을지, 혹은 부담스러워하진 않을지 알 수 없어, 누군가와 교류할 땐 음악으로 따자자면 앨범 단위가 아닌 곡 단위로 한다. 나도 선물일지, 폭탄일지 모를 앨범같은 내 서사를 내보이고 싶은 때도 더러 있지만,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넘김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넣어둘 뿐이다.
[3-3] <실패>
실패하면 결과는 아쉽지만, 과정은 남길 수 있어 좋다. 아쉬움보단 남은 것을 동력으로 다음 과정과 결과로 나아가게 해준다. 세상은 바뀐게 없고, 나도 거진 바뀐게 없다. 실패가 점점 더 늘고있지만, 신경쓰지 않으려 부교감신경을 조금 눌렀을 뿐. 역시 과학은 위대하다.
[4] <후회의 끝자락>
애초에 남에 대한 관심이 크게 없어서 뭐라하던 타격이 크게 없는데, 가끔은 꽤 아픈 경우도 있다. 결국 내 행동을 후회하게 되는데, 남탓 한다고 달라질 사람들이 아닌 것을 생각하면, 결국 어제까지의 나를 후려친건 나라는 말.
어제를 했던 일 후회하고 어제는 그제 한 일 후회하고 오늘은 어제 후회했던 것을 반대로 왜그랬을까 또 후회하다가 아까운 시간 많이도 날렸다. 시간이며 정신이며 그동안 잃어버린 기회며 생각하면 너무 아까워서 후회한걸 또 후회한다.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고 아쉽고 자책하고 반성하고 하면 개선이라도 되어야 하는데 그건 또 후회하는 만큼 개선이 안되는 것 같아서 또 뭐가 문젤까 고민하는 고착상태가 길었는데, 오늘 아침부턴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리지도 않아서 괜히 많은 것이 편하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후회의 잔고가 바닥났다. 길었던 후회에 후회가 없기를 바란다.
아무리 이런저런 고민이나 후회해도 내가 내키지 않으면 거절할거다.
[5] <페인트 모션>
폐쇄적인 인간관계를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었던건 아니다. 나의 그런 삶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겪었던 일들이 보편적인 것인지 나와 관계 없는 사람들에게 확인받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환부를 드러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다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를 보여주지 않고 나를 확인하려 했다는 것이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보여주고 솔직한 이야기들을 듣는 정답을 알면서도, 무엇 하나 놓치기 싫어서 에둘러 말하거나 듣기만 했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듣기를 주저했었던 나를 아쉬워했다. 불과 이번주가 오기 전 까지는. .
말하는 것 보단 듣는 것이 능사라고 누가 말했던가. 듣고만 있었더니 오히려 원하지 않은 상황들이 물밀듯했다. 오해가 오가고, 다른 이의 알고 싶지 않았던 냄새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전해듣고, 보게 된다. 나를 이해하고 싶어서, 위로받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난 저러지 말아야지로 끝나는 것이 씁쓸하다 못해 안타깝다. 스스로를 숨기는 것에 익숙하고, 드러내는 것에 능숙하지 못하는 페인트 모션이 몸에 익었다고 생각했는데, 난 아직 멀었나보다. 오히려 멀어서 다행이다.
[6] <10년, 1년, 1주일, 하루>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냐고 세상 욕이란 욕은 다 퍼붓고 싶었던 시절이 참 길었다. 신이 있다면 줘패고 싶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그대로 모든 것들이 나를 밟고선 비켜주지 않을 것만 같아서, 억울해 할 시간도 아까워 부던히도 목을 뻣뻣히 했다. 10년 전, 내가 지은 죄는 평생 갚는다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이번 생은 그렇게 살기로 했다고. 악으로 버틴게 죄악이 될 줄은 예상은 했지만, 몸은 이미 반응한지 오래고, 머리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죗값은 꽤나 가혹하다. . 개입하지 않으면 주고 받을 독이 없기에, 감놔라 배놔라 하고 싶지 않다. 독립적이라는 그럴싸한 겉포장을 두르고 있지만, 독단적이었다. 어짜피 괴로운거라면 당신보단 스스로를 탓하는 것이 당신에게 덜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남들에게 개입하는 것으로 밥을 먹고 산다. 우스운 일이다. 그게 벌써 1년. . 어제는 갑자기 숨이 어려웠다. 몇 주간 나아지던 호흡은 한마디 한마디에 다시 가빠지고, 한동안 바닥에 웅크리고선 후회하고, 확신했다. 그 누구도 나에게 강요한 적 없는 책임을 난 여태 왜 지려고 했나. 비로소 숨이 트인다. 길었던 퍼즐을 맞춘다.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해결할 일이, 돌려야 하는 일이 많다. . 단지 일주일이 필요했단걸 잊은 값을 오늘 하루 비싸게 청구받았다. . 가끔.. 아주 가끔 막연한 확신이 생길 때가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개입하고 개입당하는 삶. 치고 받는 삶. 저 멀리 여행도 가고, 일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등산도 하고, 책도 읽는. 강요받지 않은 책임은 불태워버리고 내가 원하는 책임을 지는 삶. 듣기만 하지 않고 이야기하려는 삶. 듣고 싶어 하는 삶. 하루하루. 딱 1년만. 10년 전처럼 웃기만 하면서.
2024년 6월 6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