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흙바닥>
술도 한 잔 했겠다, 땅바닥에 누웠겠다, 바람은 시원하고, 날은 뜨겁고 바닥은 차가우니까 기분도 적당히 좋아서 적당히 사는게 뭔지 생각좀 해봤는데, 당최 모르겠다.
적당히 건강한 것을 먹고, 운동도 적당히 하고 싶고, 일도 적당히 하고 싶고,
적당히 먹고 싶고, 적당한 거리로 사람을 만나고, 적당히 잔잔한 정신머리로 살고 싶고,
적당히 사고 싶고, 적당히 아름답게 보고, 적당히 솔직해지고 싶고,
적당히 써내려가고 싶고, 적당히 듣고 흘리고 싶고, 적당히 고민하고 싶은데
술은 과하거나 부족하고, 운동은 점점 부족하고, 일은 속뒤집히고 모르겠고,
과식하고, 위경련때매 전화하고 싶고, 사람은 안믿고, 끓는 속은 약으로 눌렀다가 개꿈꾸고 이빨빠지는 꿈 꾸고,
필요없는 것을 자주 사고, 비관적이고, 수싸움에 머리굴리고,
아직도 글 뒤에 숨는 것도 모자라 솔직하게 써내려가지도 못하고, 사소한 상황에 머리를 쥐어뜯고,
자주 때려치고 싶고 더 자주 도망가고 싶고, 숨고 싶으면서도 나에게도, 너에게도 여전히 나는 솔직하지 못하다.
하등 일에도 도움 안되고 삶에도 도움 안되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하느라 오전에 사둔 맥주가 미지근해져도, 가방이 흙바닥에 굴러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거 보면 이제 할 만큼 한 것 같기도 하다.
적당히 돌아버린건지 적당히 괜찮은건지 적당히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뭐든 적당히 하려고 한다.
[2]
<너의 부고>
운전 중에 소식을 들었을 땐 아무렇지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덜 깬 아침이라 그랬던 건지, 현실감이 없어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고선 며칠을 그냥 지냈다.
뒤늦게 소식을 찾아보고선 아 이게 정말이구나 싶었다. 떠난 너에겐 미안하지만, 그 때 까지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스스로 잔인하다고 해야할지, 감정을 읽고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긴 있나보다.
니가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부럽기도 했다. 우린 멀어졌다고 말하기도 애매하지만, 각자의 삶을 살면서 애써 가까운 사이였다고 말할 일도, 말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먼발치에서 가끔 들리리고 보이는 너는 성공한 듯 보였다. 응원하기도 했다. 니가 무슨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가도 내가 뭘 안다고 이해한다고 생각할까 하는 오만한 내가 보기 싫어서 그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람이 되어버려서, 짊어져야 할 짐이 없는, 남은 사람이 아닌 그냥 남이 되어버려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줄 알았다. 괜히 그 괴로움을 넘겨짚고 싶지도 않고, 섣불리 안타까워 하고 싶지도 않은데, 많은 생각 속에 갇힌 듯한 불편한 기분이 며칠째 가시질 않는다. 추웠던 그 겨울에 너는 왜 그렇게 갔을까.
[3]
<빨래>
세탁기도 세탁기지만 건조기가 있어서 참 편하다. 오죽하면 다들 이모님이라고 하겠냐만은. 그저 젖은 세탁물을 넣고, 설정에 맞춰서 동작 버튼 누르기만 하면 된다. 큰 옷을 반으로 줄여버리는 내 몫의 멍청한 짓만 빼면, 건조 끝나면 친절하게 소리로도 알려주고 폰에 알림도 쏴준다. 기계는 죄가 없다. 사람이 멍청할 뿐이지. 덜떨어진 나는 두 가지만 지키면 된다. 매번 건조기 물통을 비워주는 것, 그리고 먼지 필터를 청소하는 것.
세탁물이 다르니 세탁기도, 건조기도 주말엔 두세번씩 돌리는게 다반사다. 물통도 두세번씩, 먼지 필터 청소도 두세번씩 일이 늘고, 반복은 지겹다. 비워주는 것을, 청소하는 것을 미루고 두세번을 연거푸 돌린다. 건조기는 비우라 치우라 하지만 빨래는 잘 말라서 나온다.
사람도 미루고, 관계도 미루고,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엉키고 썩어서 만들어진 미루는 인간이 숨쉬는건 꾸역꾸역 미루지도 않고 잘도 쉰다.
늦게나마 비우고 치운다. 미룬 시간의 대가는 비싸고 축축하다.
[4]
<금과 틈>
시간에 붙는 이자는 싸지 않고, 주름같은 금이 늘어나는 시간은 더 짧아지고 가까워지고 가팔라지는걸 안팎으로 시끄러움을 오래 가둬보고서야 알았다.
밑 빠진 독의 물빠짐보다 더 부어 채우기엔 우리의 독엔 이미 금이 많다.
금은 눈에 보이지 않고 틈은 늘고 빠르다.
[5]
<행복은 별거야>
행복이 별거 아니란 책임없는 말은 비릿하고 구역질난다.
15분 단위로 잘라서 사는 와중에 햄버거를 입에 쑤셔넣음을 먹고 싶었던 햄버거를 생각해뒀다가 먹는 것이라고 애써 받아들이는 것. 생각 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마시는 커피를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라고 거짓말하는 것. 읽거나 쓰거나 걷기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병이 심해질 것 같은 마음을 운동과 노동의 사이 자기발전이라고 믿을 때만 찾을 수 있는 것.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창고에 쳐박고서 편안한 척 착각하는 것. 지 때문에 힘들어도 쟤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속여 위로하는 것. 억울해도, 이해할 수 없어도, 마음 같지 않아도 다 지나간다 라고 믿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고작 삼십칠년이고, 이번 생이 처음이지만, 살다보니 행복은 존나 별거 같았다. 나만 옘병을 떨어서 수치스럽고 한심하다. 스치는 바람에 살이 에는 이유를 보이지 않게 잘 숨겼다 생각했는데, 냄새는 숨길 수 없다. 악취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살아야 할 이유가 더 필요하진 않다. 다만, 덜 불행하려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이 필요해져서 이리저리 내달린다. 또 믿기 시작했다. 뛰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6]
<식기세척기>
어머니댁 캥거루족 하던 2년 정도를 제하고 혼자 산 시간을 세어보니 여덟 해 가까이다. 생각보다 느리게 가는 시간이라 잠깐 생각했으나, 화 많고 제멋대로던 20대 후반에서 더 이기적이고 정신나간 사람들을 해치고 꾸역꾸역 나이먹은 독한 내가 잠깐 억울하다 말았다.
8년 자취 인생의 1막은 처참했다. 사회생활도 모르고 집안일도 몰라 죄다 엉망이었다. 단칸방에 살며 일 미루는 꼴은 못봐도 설거지만큼은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뤘다. 시선에 걸리는 쌓인 그릇을 며칠을 견디고 살았다. 조금씩 일을 미루게 될 수 있을 나이가 되어선 설거지 미루기도 같이 떠밀려 미뤄졌다. 오늘 해야 할 일 중에 제일 싫은 설거지를 미루시지 않는 어머니는 나와 달라서 억울할 뻔 했지만, 그것도 미뤄지곤 소식이 없었다. 미룰 수 있는 일을 매일 골라야만 하는 처지가 된 나는 두번째 독립엔 식기세척기를 가장 먼저 집으로 모셨다.
나를 시끄럽게 하는 일은 식기세척기를 들이기 전 보다 줄었지만 여전하다. 그렇게 설거지 죄책감을 덜고 시간을 벌어놨는데, 골치아픈 속시끄러움이 그 자리를 기다렸다는 듯 채워버린다. 시간을 벌 줄만 알았지. 자괴감을 설거지거리 마냥 쌓을줄만 알고 치울줄은 몰랐다. 죄다 못 본 척 하고 집어넣고 한시간 반 돌려버리면 다 해결될줄만 알았는데, 돈으로 산 식기세척기가 벌어다준 시간을 채우는건 내 몫이다. 그 해 나는 지독한 습진에 오래도록 시달렸다.
그렇게 식기세척기와의 불편한 협업 이후 내 삶은 편해졌을까? 편해지고 말고.
속시끄러운 일은 여전하고, 청소솔에 세제 듬뿍 뿌리고 싱크대를 박박 문대면서 마지막 휴일 저녁을 채웠다.
[7]
<아주 사적인 이야기>
처음 사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며칠을 보내가다 겨우 마무리했었다. 그 새 몇 년 하다보니 내 자리에서 보이고 들리는 생각을 풀어내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든다. 나와의 메신저에 짧은 사진같은 기억과 생각을 쌓아두고, 내킬 때 꺼내서 다시 기억해내고 풀어내고 가지를 쳐내는 일련의 틀이 잡혀간다. 글 뒤에 숨고 싶어서, 언젠간 소설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상상을 가끔 하다가 나의 오만함과 모순에 뜨끔하고선 물러선다. 소설은 쳐다도 보지 않던 내가 읽게되고 쓰고 싶어지는 건, 상상의 범주엔 없는 전개였다. 허구는 내 그림 밖의 일. 말도 안되는, 일어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는 것들을 늘어놓고 사람을 휘말리게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 보단 사실이, 팔자 좋은 상상보단 눈앞의 답안지에 마음이 간다. 소설같은 것들을 십수년간 겪고 견뎠으면서 왜 오래 걸린건지는 다 내 마음이 좁아서겠지. 등잔 밑은 항상 어둡고 알게되는건 손을 베고 구석에 몰리고서야 알게 된다. 소설이나 현실이나 말이 안되는건 매한가지다.
글 속에 숨지도, 솔직하게 보여주지도 못하고 8차선 도로 한중간에 서서 오도가도 못하는 기분이다. 이야기 뒤에 잘도 숨어서, 누군가고 살기도 하고 죽어보기도 하던데. 나는 아직도 차에 치여도 괜찮을, 나를 좀 더 드러낼 솔직한 용기가 부족하다.
보물찾기의 시간이 끝나간다. 구석에 앉은 나는 할 말이 많고, 너는 두렵고, 너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