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2024.06월 잡생각(믿음, 신의 계획, 멀미약, 장맛비, 적당히, CD)

[1] <믿음>
바라는 것 없이 잘 지내다가도 하루에 한두가지 정도는 바란다.
며칠동안 미뤄둔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개야지,
어제 못한 업무들을 머릿속에 차곡히 넣고선 피드백 해야지,
잊지 않고 아침, 저녁 약을 챙겨먹어야지,
그걸 마치고선 산책인지 달리기인지 모를 것을 해야지,
가까운 이들에게 나의 고통을 고백하고선 욕을 실컷 해야지,
더이상은 물 속에서 숨쉬지 말아야지, 내 걱정 하지 말아야지,
오늘은 망할 덩어리가 작년보다 더 커지지 않았다고 전해들어야지.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 이 3분할을 지겹게도 생각한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 할 수 없는 것,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솎아내보지만 허술한 그물을 쉬이 통과해버린다.
해야 하는 책임을 우선 다하고선 마음의 짐을 던다. 해봐야 할 수 있고, 할 수 있어야 하고 싶은 것을 믿을 수 있지만, 나는 자주 해야만 하는, 할 수 있는 것을 건너뛴다. 어쩌면 내가 엉망인 이유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야만 하는 일은 생긴다.
[2] <신의 계획>
[1]
교수님은 이젠 원래의 약속에 6개월을 더하셨다. 더 늦게 보자는 이야기가 반갑기는 또 오랜만이다. 좋지 않은 모양의 불청객이 다른 곳으로 튈까 하는 걱정을 반년 더 유예할 수 있다.
[2]
각자를 완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그냥 각자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오해를 사기도 하고 하기도 한다. 이해받음 했지만 지나간 것들은 어찌할 수 없다. 노력으로 억지 돌린 것들도 언젠간 제자리를 찾았다.
[3]
엔진 경고등으로 날 당황하게 했지만, 내 차는 사실 그릴에 문제가 있었다. 엔진은 무슨 ..
[4]
같은 장소에서 다섯발자국만 옮겨 일했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기분으로 일했다. 상황이 바뀐 건 없다. 받아들이는 방법과 환경만 살짝 변했을 뿐이다.
[5]
같은 취향을 가지긴 어렵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싶다.
[6]
싫어하는 줄만 알았던 삼계탕을 한그릇 해치웠다. 배고픔엔 장사 없다. 언젠간 닭발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7]
기대했던 것도 좋았지만 살까 말까 했던 원두가 가장 맛있었다.
[8]
지도만 보고 쉬운 길인줄로만 알았던 등산 중에 온 몸이 다 털려서 몇시간 누워만 있었다.
비올 줄 알았던 첫날은 맑았고, 더울줄로만 알았던 둘째날은 적당한 구름이었고, 비는 마지막날에 원없이 쏟아졌다.
[9]
생각없이 들른 중고서점에서 그토록 찾아해메던 음반을 두장이나 구했다. 몇년 전 팔고선 두고 두고 후회했는데.
[10]
연휴 마지막 기상을 하고선 뭔 결심이 섰는지 수년을 손에 쥘까 말까 했던 계약서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달의 즐거운 기다림을 돈으로 샀다.
어짜피 계획대로 되는건 없다. 첫번째는 나의 계획, 두번째는 믿지도 않는 신의 계획(이라 했다.)
[3] <멀미약>
여섯번의 일요일이 지났다. 여전히 높고 낮음을 반복하고 있지만,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에세이 읽기를 자연스레 멀리하고, 한동안 싫어했던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신경질도 조금은 유해진 것 같기도 하다.3일을 밖에 나가질 않았음에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호흡이 긴, 복잡한 생각을 빠르게 끊어낸다.나의 기쁨과 남의 슬픔에, 나의 슬픔과 남의 기쁨에 덜 동요하게 되었다.다만, 몇가지 찝찝한 것들도 있다.사실이 아니라 마음을 쓸 필요 없는 것만 골라 읽는다.화 내야 할 일을 넘겨버리곤 유해졌다 하고 넘겨버린다.아무런 상호작용 없이 긴 시간을 고립한다.집중하는 시간이 조금씩 짧아짐을 자주 느낀다. 둥글해진건지 무뎌진건지 알 수 없을 때가 잦다.아. 그저 멀미약이 잘 들었을 뿐이다. 메슥거리지 않아서 파도 타는 법을 배운줄 알았는데.
[4] <장맛비>
장마의 시작이라, 비 소식이 하루 걸러 하루 있다. 지난주엔 3일 내내 집 밖엘 나가지 않았더라. 창문 볼 일도 잘 없고, 실내 생활만 하는데 비가 뭔 대수냐 했지만, 높은 습도 생각에 벌써 불쾌해진다.
반 외노자 시절, 일본과 대만 여권 도장을 번갈아 채우다가 서른을 넘어 셋을 채우곤 이러저러한 일로 4년을 보냈다. 어딘지 기억나지도 않는 입국장에선 나보고 뭐하는 놈이나며 우스갯소리처럼 묻기도 했다. 한증막 같은 두 곳에서 일하면서 취두부를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습한 공기와 친해지는 데는 계절을 두바퀴 돌아도 쉽지 않았다. 타이페이를 기억하자면 여전히 높은 습도가 먼저 떠오른다. 열에 아홉은 비가 왔다. 건물 밖으로 한발 딛으면 느껴지는 마른 것도 젖은 것도 아닌 요상한 기분과 습도는 나를 항상 불쾌하게 했었다. 그걸 빼자면, 대부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호텔과 오피스만 왔다갔다 하며 뭐에 씌인 사람처럼 일한 기억, 돌아다닐 힘도 없어서 우버이츠로 연명하고 공항과 택시에서 일한 기억이 지배적이다. 바깥 생활이 길어지고, 당연히 몸은 상했다. 많은 병을 그 시절에 얻었고, 습도만큼 불쾌하게 오래도록 나를 불편하게 했다.
쏟아지는 장맛비 마냥 예상하지 못하게, 어쩔 도리도 없이 비는 길게 이어졌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개운한 날씨만이 이어진 기분이다. 그러고선, 쏟아지는 장맛비 마냥 예상하지 못하게, 잠잠했던 병 수집이 다시 시작되었다. 속을 감싸곤 구르며, 택시를 불러 병원 가기를 고민하며 밤새는 날을 두번 보냈고, 어제 밤 세번째 고비를 넘겼다. 비 마냥 예상하지 못했다.
끝났다고 생각한 장마가 다시 시작된 건지, 아니면 물 머금은 공기가 익숙해져 들보가 썩어나가는줄 몰랐던건지 나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장마가 다시 왔다.
[5] <적당히>
흰머리가 늘고 관계가 소원해질수록 나의 적당함은 주머니 속의 송곳 마냥 있어야 할 자리를 모르며 날뛰고 존재감을 사납게 보인다. 초보 서퍼 마냥 높고 낮음을 자주 오가다가 파도에 쳐박히는 듯 살아, 중심을 잘 잡고 흔들리지 않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팔다리는 어쩔 수 없이 허우적댄다. 내 눈엔 적당히 유연하게 높은 파도를 빠르게 빠져나가는 모든 것이 부러웠다.
적당히 하지 못한 것들에서 잦은 문제가 생긴다. 성급히 가까워지거나 혹은 망설이다 멀어진 것들에게서 ‘그럴줄 몰랐다’, 그럴 줄 알았다‘ 라는 변명 섞인 아쉬움을 짠물마냥 삼키고선 헛구역질하며 뱉는다. 다음부턴 적당히 잘해보자는 자로 잴 수도 없는 기준을 책임없이 다음의 나에게 던졌다. 좋지 않은 일에도, 더 잘해볼걸 하는 후회에도 ’적당하다‘는 자기변명을 원망했다.
적당한 온도의 목욕물은 나를 기분좋게 하지만, 적당히 걷는 것이 누군가에겐 전력질주만큼 숨차기도 하다. 숨을 넘어 헛구역질이 난다. 간장도 적당히, 소금도 적당히란 말은 니 입에 맞게 알아서 간을 맞추라는 말인줄 모르는 것은 아닌데. 종종 위만 바라보고, 현기증이 주저앉는다.
적당히가 뭔지도 모르는 나는 뭐든 적당히 하려고 한다.
[6] <CD>
꽤 오래 CD를 모았었다. 지금보다 예민하고, 음악에 관심많던 시절이었는데,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긴 음반을 사러 용돈을 모아서 1호선 지하상가 신나라레코드로 향했다. 책장 가득 모인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 땐 스마트폰과 멜론이 공든 책장을 짐짝으로 만들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 눈에 거슬리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몇년 전 중고서점에 재고가 많다고 팔리지 않은 몇장을 빼고 넘기고선 백만원 조금 되지 않은 현금을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속시원했다.
요즘은 다시 CD를 모은다. 매 주말 중고 서점의 CD 섹션의 쇼케이스와 작은 글자들을 놓치지 않고 훑고선, 운이 좋으면 마음에 드는 CD 몇장을 손에 쥐고 한두개 정도로 추려 사곤 이내 집으로 와서 일주일 내도록 듣고 듣는다.
많은 것들을 집에 들이고 보내기를 반복하고, 좋은 것은 기억하고 싶어 가능한 오래도록 눈 앞에 두고 싶은 마음이다. 우연을 가장한 노력으로 찾아 듣는 CD 음악이 좋다. 그 땐 그랬지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가끔은 시절이 떠오르지 않기도 하다. 나는 오래두고 보고싶은 것들의 애틋함을 자주 시선에서 놓치고선 구천을 떠도는 귀신마냥 서성인다.
오랜 기억을 놓치지 않고, 좋은 것은 내도록 눈 앞에 두고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다시 서점엘 간다.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 같지만.
2024.07.03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