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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24년 12월의 마지막 주 였습니다.
일본은 연말연시 연휴가 꽤 긴데 이대로 집에서 올해를 끝낼순 없다는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죠.
2024년을 이대로 끝내버린다면 뭐가 가장 아쉬울까?
문득 눈이 가득 쌓인 설경을 못보고 끝내기엔 너무 아쉽고, 여태껏 가보지 못했던 곳의 경치를 보면서 사진으로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곳, 일본 혼슈의 최북단인 아오모리현으로 가는 신칸센을 당일 예매한 뒤 카메라 가방을 메고 몸을 실었습니다.
열차가 얼어붙어 멈춰있는거 같지만 잘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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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칸센을 타고 가다 보면 어느덧 새하얀 설경과 차창 너머로 마주합니다.
제가 사는 도쿄는 기후가 제 고향 부산과 비슷해서 겨울에 눈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군대가 강원도 산골이라 겨울철=제설 시즌에 미친듯이 내리는 눈을 하얀 똥가루라 지칭하며 질색팔색을 했었는데… 사람이 영악한게 한동안 접하지 않으니 그게 또 그립더라구요.
신칸센의 정차역인 신아오모리 역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온세상이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습니다.
아오모리 역사 근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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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즉흥적으로 목적지를 정해가며 돌아다녔는데 모든게 너무 설레었고 즐거웠습니다.
적설로 인해 느릿느릿 오가는 버스랑 전차도, 얼어버려 조심조심 걸어도 어쩔수 없이 미끄러지는 눈쌓인 거리도, 새하얗게 도색된 듯 눈과 하나가 되어버린 건물들도 모두 운치있었습니다.
눈 앞에 있는 셔터 찬스를 놓칠수 없어 무작정 찍다보니 몇 장 건진 사진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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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모리도 홋카이도 못지않게 해산물이 신선하고 저렴하며 맛있습니다.
비싼 고오급 회나 초밥을 먹기엔 그렇게 땡기지도 않고 보통 그런 곳은 예약이 필요한데 연말연시엔 아에 문을 닫아버리기도 해서 문 여는 현지인 맛집 위주로 돌아다녔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곤 아오모리역 근처에서 먹었던 야키보시(건멸치) 라멘, 히로사키역 근처 상설 시장에서 먹었던 카이센동입니다.
멸치 육수의 풍부한 맛이 느껴지면서도 깔끔한 라멘과 1000엔 밖에 하지 않는데 신선하고 양도 많은 카이센동은 이 곳 아오모리 현지인들이 평소에 애정하며 자주 접하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한국어를 모르니 이 글을 본다해도 모르겠지만 대학원 동기이자 히로사키 대학 교수인 안나카상, 20대부터 절친인 사카이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화려한 맛은 아닌데 아직도 가끔 생각나는 깊으면서 깔끔한 야키보시 라멘
이 모든걸 다 합쳐서 단돈 2000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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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제가 갔던 12/30~31이 특히 눈이 많이 내려서 전차나 버스는 구간별로 운행이 중지된 곳도 많았습니다.
목적지를 아오모리로 정하기 전에 바로 옆인 아키타현도 고려했었는데 잘못 골랐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시내에 고립될 뻔 했습니다. 럭키 비키잖아?!
그리고 그 와중에도 행동반경을 넓혀 돌아다닌 결과 나름 인생샷을 건질수 있었습니다.
물론 보정을 조금 거치긴했지만 히로사키성 앞에서 찍은 사진이 한 편의 수묵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건축과 자연, 그리고 사람.
무계획 극 P 여행이지만 인생샷 한 장 정도는 건져야지 하는 마음으로 향했는데 그걸 달성한 뿌듯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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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저에게 이동의 자유는 삶의 원동력 입니다.
주말에도 미친듯이 근교를 걸어다니며 먹방을 찍지만 역시 가끔은 멀리 가야 만족감을 느낍니다.
한 달 전에 갔다왔으니 지금은 만족하냐구요? 아니요.
지금은 더 멀리 유럽, 남미로 가고싶습니다. 어쩌죠 이 역마살을.
2025년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