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겐 겨울이 오면 찾게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철도원, 이터널 션샤인 그리고 러브레터입니다. 이 중에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장편 상업영화 데뷔작인 러브레터(1995)는 2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 속 겨울의 차가움과 그 온도가 주는 시린 설렘이 고스란히 보는 이들에게 전해지는 그런 작품입니다. 다시 감상한 영화는 매우 이상한 작품이면서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았는데요. 오늘은 러브레터(1995)를 다시보며 들었던 몇가지 생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Fuji TV.
영화의 간단한 시놉시스는 이렇습니다. 히로코는 조난사고로 죽은 약혼자 이츠키를 아직까지 잊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의 2주기 추도식이 있던날 약혼자의 졸업앨범에서 지금은 없어진 예전 집주소를 발견하고,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의 내용은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냅니다.” 분명 닿지 않아야 할 편지인데, 히로코는 답장을 받게 됩니다. 답장을 쓴 사람은 동명이인의 이츠키 양이 쓴 것이죠. 이츠키 군으로 이어진 두 사람, 생김새마저 비슷한 두 사람은 그에 대한 이야기로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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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기억 속의 러브레터(1995)는 사춘기 소년 소녀의 말 하지 못한 짝사랑의 감정이 더 크게 와 닿았습니다. 도서관 카드에 그저 이름을 적으며 감정을 내비친다든지, 같이 시간을 더 보내고 싶지만 답지를 맞춰본다며 핑계를 대는 모습이라든지 말이죠. 주고 받는 편지를 통해서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아 그것이 나의 첫사랑이었구나’를 깨닫는 것이 더 큰 줄기의 영화로 기억했습니다. 중학생 때 학원을 오다가다 스치듯 지나간 인연들 중 그 여자아이와 좀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는 어떤 핑계를 댔었던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죠. 제 오랜 감상문을 보면, 영화 제목인 러브레터를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보내는 메세지라고 해석을 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영화를 봤을 당시의 제가 이런 장면들에 더 공감이 갔기때문에 이런 사춘기 감정선의 영화라는 느낌이 남아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건 영화를 절반만 이해한 것이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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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절반이 이츠키 양이 과거의 사랑을 깨닫는 러브레터를 쓴다면, 히로코는 과거가 되어야만 하는 사랑을 잊기위해 러브레터를 씁니다. 약혼자가 죽고 현재의 연인이 있지만, 히로코는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 하고 2년전 자신의 감정에 멈춰있습니다. 그래서 수취인불명이 됐어야할 편지가 답장이 왔을 때 천국에서 보내는 답장이라고 믿고 싶을 만큼, 히로코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편지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히로코는 약혼자가 나를 선택한 이유가 과거의 첫사랑과 닮았기때문이라고 깨닫지만, 배신감보다는 질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며 죽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싶어하죠. 하지만, 그가 죽은 산을 마주하고나서야 그동안 피해왔던 약혼자의 죽음을 실감하며, 영화의 명대사로 남아있고, 또 처음 부친 편지에서 하고 싶었던 말 “おげんきですか. はたしは げんきです”을 외칩니다. 단순히 안부를 물었던 일방적인 편지와 달리 산은 메아리로 같은 말로 히로코에게 대답해줍니다.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생사의 기로에 있는 사실상의 운명공동체인 이츠키 양에게도 전해지죠. 이렇게 과거에 얽매여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던 히로코는 죽은자에게 안부인사를 묻고/들으며 삶으로 돌아오고, 이츠키는 과거를 마주하고 받아들이며 삶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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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 러브레터(1995)는 마냥 풋풋한 느낌의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영화의 포스터이자 첫장면이 히로코가 눈밭에서 숨을 참고 조난당한 이츠키 군의 상황을 재연해는 듯한 유사죽음에서부터 시작하고는 가쁘게 숨을 쉬며 추도식의 사람들 곁으로, 즉 삶으로 돌아오면서 영화의 오프닝이 흐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폐렴으로 잃은 이츠키 양은 기침을 하며 단순 감기라고 넘기지만, 사실은 아버지와 같은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엔 보이지 않았던 키워드들이 새롭게 보이니 새삼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 교수님께서 해준 말씀이 생각이 나더군요. 교수님에게 좋은 영화란 같은 영화를 보는데도 20대 때의 느낌과 50대 떄의 느낌이 다른 영화라고. 여러분은 이 영화가 어떻게 보일까요? 눈이 소복히 쌓이면 생각이 나는 영화, 러브레터(1995)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