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구정만 되면 친구들과는 극장에서 최신 상영작을 보고 같은 날 저녁엔 가족들과 설날 특선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외화 같은 경우는 우리말 더빙까지 입혀져 더욱 특별한 감상을 할 수 있었죠. 저는 내부자들(2015)과 같은 자극적인 영화는 설특선 편성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설특선 편성은 가족들이 모여서 가볍게 웃을 수 있거나 혹은 같이 이야기할 거리를 생산해내는 그런 영화들이 메인을 이루어야한다고 봅니다. 평소엔 날을 세우고 비판했을 가문의 위기(2005)와 같은 영화도 설날에 가족들과 본다면 “그래 설이니까~”하고 넘어 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점에서 MBC의 이번 설특집영화로 편성된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2020)은 설에 온 가족과 함께 보기에 최적의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만듦새는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탈 수준으로 잘 만들었고, 영화의 배경이 95년인 점은 세대간의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죠. 사랑스런 고졸 여사원들의 회사 내부 고발이야기,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2020)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롯데 엔터테인먼트.
간단한 시놉시스는 이렇습니다. 1995년, 입사 8년차이지만 고졸이라는 이유로 말단 직원 신세를 못 벗어나는 친구 3명이 있습니다. 커피 타기, 사무실 청소, 서류 정리가 일상인 이들은 진짜 업무라는 것이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토익 600점만 넘기면 대리로 승진을 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희망을 품고 영어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친구가 회사 소속 공장에서 폐수가 유출되는 것을 목격하고 다른 두 친구들과 힘을 합쳐 회사를 상대로 폐수 유출과 관련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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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힘은 가벼움입니다. 영화의 키워드를 나열하자면, 내부고발, 90년대의 사내문화, 학력우선 위주의 인사처리, 실제 있었던 페놀 유출 사건 등 암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 키워드들을 사랑스런 캐릭터와 코미디 영화의 공식을 따르며 무겁지 않게 만들어졌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 다크 워터스(2019)가 느리고 무겁게 만들어진 것과는 결이 다르죠. 그리고 이 가벼움에 지분을 크게 차지하는 것이 캐릭터들입니다. 고아성, 이솜, 박혜수 이 세 배우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의 앙상블은 영리하게 극중에 녹아져 있습니다. 그저 이 세 친구들이 겪는 에피소드들을 보고 싶을 정도로 배우들의 케미가 좋습니다. 전달은 가볍게 하지만 담고 있는 메세지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아마 여기서 느끼는 괴리감을 못 받아들이는 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의도된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이 영화는 토익도 페놀 유출도 핵심이 아니라 영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장치이지, 영화의 주제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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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힘없는 개인이 좌절하고 또 좌절해도 함께 모여서 아이 돈 기브 업, 유 돈 기브 업, 위 돈 기브 업 이라고 외치며 결국엔 역경을 이겨내는 이야기가 주제입니다. 그래서 좌절의 상황을 길게 유지해 나가지도 않습니다. 과거의 좌절도 길게 설명하지 않죠. 개인이 기업과 싸운다는 이야기 자체가 판타지인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영화에서까지 그런 현실을 고증하며 영화를 피곤하게 감상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영화가 주는 순수한 재미와 영화 속 캐릭터들을 응원하며 2시간을 보내면서 현실을 도피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현실성이 없더라고, 요즘같은 시기에 저는 이런 무대포적인 해피엔딩이 보고싶습니다. 마치 저도 영화의 캐릭터들과 같이 힘을 합치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간접경험을 하고나면, 회사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죠. 약 1주일치 정도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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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끼리 이 영화를 보고나면, 행복하게 영화를 잘 봤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그 시절엔 그랬지, 라떼는 말이야 라는 부모님의 소싯적을 들어볼 수도 있겠죠.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다들 예민해지고 지치는 시기에 건강하게 웃으면서, 오늘의 나보다 성장해 있을 것만 같은 내일의 나를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2020)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