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김춘수의 <꽃>
흔히 연인사이에서 그 감정을 나타내는 데에 많이 쓰이는 김춘수의 ‘꽃’ 입니다만, 넓은 의미로 보면 인간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시인의 고뇌가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사회적 동물이기에 인간은 본인 안에서 스스로 해답을 내리기를 두려워하고, 외부의 누군가에게 불려지고 난 다음에야 무의미에서 탈출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요즘 우리는 모든 것을 외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이런 성향을 가속화시킨 것이 SNS죠. 우리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오나요? 아니, 어딜 향하나요?
영화 프랭크(2014)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샤워할 때를 포함해서, 항상 무표정의 가면을 쓴 천재(?) 아티스트인 프랭크를 옆에서 지켜보며, 그를 동경한 워너비 아티스트, but 재능부족인 존의 회고록입니다. 존은 프랭크의 밴드인 the Soronprfbs의 앨범의 제작일기를 유튜브에 올리고, 그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트위터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런 존의 업로드는 그들을 소위 말하는 SNS스타로 만들어, 큰 음악축제에 초대도 받게됩니다. 그러나 프랭크와 밴드 멤버들은 이를 달가워 하지 않고, 메인스트림으로 밴드를 끌어내려는 존과 마찰이 생기게 됩니다.
Maggie Gyllenhaal, Michael Fassbender and Domhnall Gleeson in FRANK, a Magnolia Pictures release. Photo courtesy of Magnolia Pictures.
셜록 홈즈의 전기 작가인 존 왓슨과 이름이 같은, 프랭크의 전기작가 격인 존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음악인이 되고 싶고, 천재(?) 아티스트인 프랭크를 닮고 싶어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결국 외부로부터의 음악인 존으로 불리고 싶은 인정입니다. 본인의 생각과 감정은 있지만, 이것들을 풀어내는 매개체인 트위터를 통해서 외부에 알리고, 본인의 상태를 꾸준히 알림으로써 존재를 확인하려합니다. 그런 외부로부터의 인정을 갈망하는 와중에, 그가 가지고 있는 본인이 이루고 싶지만 스스로 한계를 느꼈던 음악인으로서의 명성을, 프랭크를 이용해 얻으려고하는 확고함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만난 팬들은 그가 이용하려던 프랭크의 음악적 팬들이 아닌, SNS를 통해 존의 일기를 즐기던 본인의 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프랭크에 대한 본인의 경외심 비슷한 것 때문에, 본인에 대한 확고함없이 마지막 무대에 올라서도, 그리고 무대를 내려와서도 프랭크에게 집착합니다.
Domhnall Gleeson in FRANK, a Magnolia Pictures release. Photo courtesy of Magnolia Pictures.
본인 스스로가 만든 기준이 아닌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하는 외부적 판단에만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외부 요인들이 본인의 내집단이 어디인지를 헷갈리게 만들어, 결국 진정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안중에도 없고, 남들의 시선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연극 관객모독의 오프닝에 나오는 대사가 이에 촌철살인을 날립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을 보러온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집단에 함께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이는 예술을 즐기는 행위 자체가 가지는 가치를 순수한 내적인 유희가 아닌, 외부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 가치 기준이 외부에 있을때, 생기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한 생각이 겉핥기 식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입니다. 존의 가치기준이 외부에 있기때문에, 정작 본인이 닮고 싶어하는 프랭크의 음악에 대해서는 이해도가 떨어지고, 그 결과 그의 음악을 대중적으로 바꾸려하고, 이 것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그 모든 것은 심도깊은 고민의 부재에서 시작됐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Michael Fassbender in FRANK, a Magnolia Pictures release. Photo courtesy of Magnolia Pictures.
이번에는 존의 피사체인 프랭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계속 프랭크를 ‘천재(?)’ 아티스트 라고 표현했습니다. 존을 비롯한 팀멤버들은 프랭크를 천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가 천재일까요? 영화를 보고 나온 많은 관객들이 그렇다와 아니다로 나뉠 것 입니다. 그러나 제가 정작 생각하는 것은 저 질문은 전혀 필요없는 질문입니다. 프랭크는 다른 천재들과 같이 미세한 부분에서도 욕심을 내는 완벽주의자이고, 그의 음악은 전혀 대중적이지않으며, 그만의 세계가 확고해 보입니다. 가면을 항상 쓰고 행동하는 등 일반인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천재라는 기준 또한 외부세계에서 부여한 정체성입니다. 천재들이 본인들 입에서 ‘나는 천재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희박할 것입니다. 프랭크가 정신적으로 불안 증세가 오는 것은 존으로인해 그의 정체성인 그의 음악이 대중적으로 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심해집니다. 그의 가면또한 외부의 그런 정신공격들로부터 방어하는 방패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Maggie Gyllenhaal and Michael Fassbender in FRANK, a Magnolia Pictures release. Photo courtesy of Magnolia Pictures.
그런 프랭크가 되고싶은 프랭크의 오랜 친구 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없음에 그는 프랭크의 가면을쓰고 자살을 선택합니다. 돈은 존이 인정하는 그만의 음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거대하게 자리잡은 프랭크라는 외부 가치 기준을 씻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프랭크와 같은 가면을 삶의 마지막에까지 쓰고싶어하고, 프랭크 본인도 가면을 벗기를 두려워합니다. 그가 가면을 쓰고 그의 마음이 이끄는 음악을 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그 또한 사람이기에 가면이라는 특수성을 버리고난 뒤에 본인이 주변인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를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밴드 멤버들에 의해 치유됩니다. 밴드 멤버들은 세상이 이야기하는 외부의 잣대를 프랭크에게 들이대지않고, 서로가 있는 그대로 서로를 믿음으로써 하나가 될 때, 존 또한 그가 쫓았던 것이 본인의 생각과 다른 것을 깨닫고 비로소 그의 온전한 생각으로 내린 순수한 결정으로써, 밴드 멤버들을 뒤로 한 채 다른 길로 떠납니다.
Maggie Gyllenhaal, Michael Fassbender and Domhnall Gleeson in FRANK, a Magnolia Pictures release. Photo courtesy of Magnolia Pictures.
영화가 개봉하고 난뒤에 심심찮게 들리던 대화가 ‘그래서 마이클 패스벤더 얼굴이 나와 안나와?’ 이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 관객모독의 대사와 같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서야, 여러의미로 그 질문에서부터 자유로워질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선가부터 우리가 만든 가면을 쓰고, 상대방이 원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본인의 마음을 숨기는 것이 미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착화가 되어서 일까요? 본인의 표정을 잃다보니, 마음에서 내는 스스로의 소리를 못찾고 헤메는 경우가 많아지고 이것을 외부에서 채우려고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영화 프랭크(2014)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파사드(facade)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