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Glitch Coffee (진보쵸/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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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페를 다루는게 너무 늦었다. 물론 유명한 카페고 내가 자주 가는 곳 중 하나인 것도 이유로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 산미가 있는 맛있는 커피를 처음 접한 곳이 이 글리치라는 카페이기에.
아마 2016년 가을 즈음이 아니었을까. 어떤 커피를 마셨는지 그리고 어떤 맛과 향이 있었는지 6년 정도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때 마셨던 커피는 커피 좀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들어봤을 과테말라의 인헤르토 농장의 게이샤 품종이었고 로스팅은 약배전이었으며 테이스팅 노트는 플로럴, 레몬, 허브 등 이었다. 아직 강배전의 쓴 커피 밖에 몰랐던 나에게 ‘농담이 지나치네 커피가 무슨’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문구였다.
물론 미각도 둔하고 아직 산미가 있는 커피를 접해보지 못한 내가 테이스팅 노트에 적힌 맛을 그대로 느꼈던건 아니다. 하지만 커피에서도 이런 맛이 날 수 있고 그게 싫지 않다는 느낌을 받은건 틀림없이 내가 커피 오타쿠가 되어버린 결정적인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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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했을 당시엔 진보쵸라는 도쿄의 거의 정중앙에 위치한 점포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오사카, 나고야 같은 광역도시에도 점포를 전개하고 온라인 매장도 성황리에 운영중이다. 헌책방이나 학생들의 거리로 유명한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이런 곳에 카페가 있나?’라는 느낌도 들지만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처음부터 스페셜티 커피를 취급하며 바리스타의 숙련도와 커피 원두. 포스팅의 퀄리티도 높았기에 팬층이 두터운 카페 중 하나이다. 일본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 오는 관광객들에게도 유명해서 삐로나가 창궐하기 전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비중도 항상 높았었다. 커피가 맛있는게 제일 중요하지만 투박한 인테리어와 바리스타와의 거리가 가까운 것도 고객들을 부르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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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역사가 오래된 카페이기에 이 곳 출신 바리스타들의 활약상도 상당하다. 애초에 글리치를 만든 스즈키 바리스타는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 폴 바셋이 만든 동명의 카페에서 오랜기간의 수행을 거쳐 창업을 했다. 그 명성을 듣고 모여들거나 그의 밑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은 바리스타들도 다들 우수한 분들이 많은건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다른 카페로 이직하기 보다는 다들 독립하는 경향이 짙은데, 출신 바리스타들이 만든 유명한 카페를 예로 들자면 도바시 바리스타의 Ignis와 코사카다 바리스타의 Raw sugar coffee roasters가 있다. 두 곳 모두 개성적인 약배전의 커피를 제공하고 있으며 필자도 직접 방문한 적이 있다. 기회가 되면 이 두 곳에 대한 글도 한 번 적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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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듯이 역사도 깊고 팬 층이 두터운 로스터리&카페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조금 발길이 뜸하게 되었다. 이유중 하나는 단순히 내가 이사를 해서 글리치에서 멀어진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내 취향과 글리치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최근에 접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잠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요즘은 커피를 로스터리에 공급하기 전에 특수 가공(예를 들면 효모가 든 탱크에 원두를 집어 넣어 발효시키거나 이산화탄소를 넣어 발효를 촉진 시키는 등의 행위)가 스페셜티 커피 업계에서 유행하고 있다. 커피 자체의 향을 부각시켜주기도 하고 커피의 다양성을 증진하는 기능도 하기에 이러한 무브먼트 자체를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결과로 따라오는 향과 맛에는 그 특유의 발효향이 따라오는데 개인적으론 너무 인공적으로 느껴져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글리치에서 판매하는 원두를 보면, 다이내믹 체리-컬터링 프로세스 등 이름만 들어서는 어떠한 가공을 했는지 알기 힘든 것들이 많다. 실제로 사서 마셔보았지만 역시 자극이 생각보다 강한 것들이 많았기에 자주 찾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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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품질의 원두는 차마 상상하기도 힘든 복잡한 맛을 느낄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하나 하나 다른 맛을 지니고 있기에 그러한 다양성에 끌려 커피 오타쿠가 되었다. 그리고 글리치는 나에게 그러한 접근법을 파고드는 계기를 만들어준 좋은 카페이다. 하지만 커피를 점점 알게 될 수록 내가 어떠한 커피를 더 선호하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해져 가는데 사실이다.
다른 카페에서 맛 볼수 없는 커피들도 취급하기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글리치를 찾을 예정이며 지인들에게 충분히 추천할 만한 카페 중 하나이지만, 개인적으로 당분간은 서로의 방향성을 탐색하며 지켜보는 시기에 접어든 것 같다. 어렵다. 커피도 입맛도.
+23/8/4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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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커피의 매력에 빠지게 된 첫 단추. 글리치는 항상 마음 한 켠 구석을 지키고 있는 로스터리다.
거의 매 주 들르던 때에 비하면 애정이 식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또 특수가공을 거친 커피보다 자연스러운 커피를 더 좋아하기에 시험적인 커피를 많이 소개하게 된 글리치가 정체성을 잃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도쿄에서 오랜만에 글리치를 들렀을 때 뭔가 오해가 풀린듯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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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정도 되는(?) 커피 매니아 들은 유명 로스터리 카페에 들르면 아는 바리스타나 로스터가 한 두명은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아는 사람 한 명은 있겠지 라는 마음으로 들렀는데 웬걸 다 뉴페이스였다. 글리치를 대표하는 컬러인 블랙을 멋지게 차려입은 바리스타 두 분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실은 하루만 늦게 갔어도 오너인 스즈키씨나 매니저인 아키라씨를 만날 수 있었는데 태국 출장을 다녀온 다음 날이라 출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부터 바뀌지 않는 창가자리의 횡단보도 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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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의 라인업이 더 늘어났다. 특수가공을 거친 것도 많았지만 볼리비아나 인도네시아 같이 스페셜티 커피 시장에서는 아직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원두를 취급하고 있다는게 좋게 보였다. 그리고 처음 글리치를 접하게 되었을때 보았던 워시드 게이샤 같은 순수하게 소재의 힘으로 승부하는 원두도 취급하고 있었다.
그 때 유독 눈에 띄는 원두가 하나 있었다. 과테말라 로즈마 농장의 워시드 게이샤. 한 잔 가격은 무려 3천5백엔(3만원이 넘는 가격)이라 고민하던 그 때, 컵노트를 보고 문득 2016년에 나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던 과테말라 엘인헤르토 농원의 워시드 게이샤가 떠올랐다. 그 때도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마시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뭔가 그 감동을 다시 느낄수 있지 않을까 하는 두근거림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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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모네이드, 멜론, 청포도 그리고 게이샤의 대표 아로마라고 할 수 있는 자스민 향. 완벽했다. 분명 커피를 업으로 하게 되면서 많은 커피를 접했고 감탄할 만한 커피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했다. 요즘 좋게도 나쁘게도 ‘와 이게 커피라고?!’라는 반응을 일으키는 커피는 많이 있었지만 ‘이게 진짜 커피지! 게이샤지!’라고 입고리가 올라가는 커피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것 같다.
다 마시기가 너무 아까워서 조금씩 아껴서 마셨다. 과장이 아니라 2016년도의 기억이 되살아 나는것 같았다. 이런 만남을 위해서 커피를 좋아하고 찾아다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때 마신 과테말라 로스마 농장의 게이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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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이 커피의 여운에 잠겨있고 싶은 기분도 있었지만 다른 커피도 맛보고 싶었다. 글리치는 라떼에도 싱글오리진(단일 품종, 블랜드x)만을 취급하는데 커피 본연의 향미를 살리면서 우유와의 조화도 생각해야 하는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 선택한 원두는 맥시코 오아사카 아로요 농장의 네츄럴 티피카. 초콜릿 같은 진한 단맛과 후추를 떠올리게 하는 이국적인 향신료의 느낌이 우유와 잘 어우러져 매력적인 풍미를 선사했다. 아까 마신 한 잔과는 너무나도 달랐지만 셰프가 정성을 다해 조리한 퓨전요리를 먹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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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뚝심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감동케하기에 충분하다. 글리치가 일본 스페셜티 커피 마켓의 게임 체인저이며 훌륭한 로스터와 바리스타를 배출해 온 요람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글리치는 과거의 업적이 아니라 지금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만났던 낯선 바리스타 들은 최고의 커피를 선사해주었고 한 때 정체성이 변했다고 오해하며 거리를 두었던 나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23.08.04 - Glitch Coffee